제목은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11년이라고 해도 내가 컴퓨터를 사용해온 효용성은 컴퓨터를 이용해온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참으로허무하다 할 수 있겠다. 다른 파워유저분들처럼 오랜기간 써온것도 아니고 PC통신을 이용하던 시절은 없었지만 나의 11년은 너무나 소중하였었고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기에 잊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다. 솔직히 컴퓨터에 관한 이야기라기 보단 컴퓨터와 각종 관련된 이야기가 뒤죽박죽 되어 버리겠지만 기억력 나쁜 내가 더 잊어먹기 전에 이번기회에 뒤죽박중이언정글로서 남겨두는 편이 좋을거 같다.
내가 컴퓨터를 처음만지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1년전 초등학교 3학년 즈음 일 것이다. 나는 이때 같은 또래 아이들과는 유별났던게 다른 애들이하던 놀이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냥 혼자 있고 싶어 하던 탓에 이때의 내 존재감은 타인에게서 흐물흐물할 지경이었다.
이 시절 일은 잘기억이 안나지만 아마 조상님의 제사를 지내려고 큰 아버지댁에 머물르던 중 사촌 형의 집에서 컴퓨터란 놈을 처음 보게 되었다. 그컴퓨터는 요즘은 상당히 많이 쓰이는 타워형이 아닌 옆으로 눕힌 데스크탑의 형태였던걸로 기억한다. 당시 그 컴퓨터는 케이스의상판이 벗겨진 상태였는데 당시 친척 형 왈 "이거 고장난거라 켜지지 않아" 라고 말하면서 분해된 컴퓨터에 대해 나의 관심을 때게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때 컴퓨터란 것을 처음 본, 그것도 전라(?)로 분해된 컴퓨터의 모습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고이때의 인상이 지금의 컴퓨터에 대한 애착의 시작이었던것 같았다. 당시 집안 사정은 상당히 좋지 못했던 탓에 나만의 컴퓨터는바라기 힘들었다. 가끔 TV에 나오던 intel inside광고만 멍하니 처다보거나 동네 큰 길에 있는 삼성전자 대리점 앞에비치된 전자제품 팜플렛을 주기적으로 뽑아가서 팜플렛에서 소개하는 삼성전자의 컴퓨터들을 보면서 군침을 돌리거나 버스타고 도서관으로뻔질나게 드나들며 어린이용 컴퓨터 서적을 섭렵해 가는 것이 전부였다.(여담으로 이때의 사서 아주머니와 엄청나게 친해지기도했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컴퓨터를 만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었는데 학교에서 반 단위로 컴퓨터실을 이용하게 한 것이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초등학교는 상당히 희한한 학교 였었는데 컴퓨터실이 2곳이 있었다. 한곳은 구교사에 있었고고 한곳은 구교사와 구교사 사이를 잇는 신교사에 있었는데 이 신교사 3층인가 4층의 컴퓨터실은 모든 컴퓨터가 무려 매킨토시였다. 당시에는 처음봤을때 '오 이게 컴퓨터구나','책에서 보던 까만화면과는 다르네'하는 감상이 전부였지만 몇년 후에 이때의 기억을 회상해보니 평범한 학교에서 매킨토시가 비치되어 있었다는 것은 내가 다니던 학교 범상치 않은 학교였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고 지금도 그러한생각이 든다. (당시의 컴퓨터실에 비치된 기종은 PowerMac 7200시리즈라 추정하는데 그 때에는 컴퓨터의 기종에 별 관심이없었던 탓에 기억하던 생김새나 특징을 잡아봤을때 이놈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 때의 컴퓨터실을 이용하던 기간은 잊혀지지가 않는데 아무래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사용한 컴퓨터 였는데다가 지금 생각해도 멋지다고 생각하는GUI인터페이스 그리고 슈퍼마리오와 이상한 게임 하나 덕일 것이다.(Netscape도 이때의 기간을 기억하게 하는데 한몫했었는데 Netscape의 웹페이지 로딩시 돌아가던 로고가 항상 신기해서 웹페이지보다 그 로고만 보고 있었을 정도였다. 또한내가 처음으로 인터넷에서 Daum에 회원가입을 하기도 했었다.) 이 때가 어쩌면 가장 키보드를 두들기기 즐거웠던 시절이었던 것같았다.
컴퓨터실을 이용하던 도중의 애피소드 하나가 기억나는데 당시 학교에서 수강비를 내고 별도로 진행하는 컴퓨터 수업을 듣는 학생을 제외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매킨토시를 오래 잡을 수 없었는데 전 학년이 반단위로 돌아가면서 실습으로 잡다 보니 1주일에 몇번씩 밖에 잡아 볼기회가 없었던 것이었다. 학교측에서도 이 상황을 알았는지 실습시간동안 실습 내용을 잘 수행하던 학생에게는 방과후에 1시간 정도컴퓨터실을 이용할수 있는 이용권 같은것을 제공하였었다.(실습 외에도 다른 방법으로 이용권을 구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지금은 잘기억이 나질 않는다.)이 사실을 알게된 초반에는 너나 나나 이용권을 갖기위해 무진장 애를 썻으나 당시의 나는 상당히 영악했던건지얼마 안가서 공략 대상을 실습이 아닌 컴퓨터실 선생님에게로 돌렸었다. 방과후 컴퓨터실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 되면 먼저 나서서부탁하지도 않았음에도 컴퓨터들을 끄고 자리를 정리하였으며 이러는 잠깐 잠깐식 키보드를 두들기다가 어느샌가 부터는 이용권이 없어도방과후에 자리가 비는곳 아무곳에나 않아서 키보드를 두들기게 되었다.
사실 이 때까지만해도 나는 신교사의 컴퓨터실만 알고 있었지 구 교사의 컴퓨터실의 존재를 몰랐었는데 저 학년인 내가 구교사에 가볼 일도 없었고아무도 이 구 교사 컴퓨터실을 언급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이후 구교사 컴퓨터실의 존재를 모르다가 2학기 초 책을 빌려보기 위해구교사에 있는 도서실을 찾아가다가 구교사의 컴퓨터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구교사의 컴퓨터실은신교사의 컴퓨터실처럼 매킨토시가 아닌 평범한 PC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부 DOS깔린 386컴퓨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실습용으로도 쓰지 않는데다 쾌쾌한 냄새도 나기도 했었고 컴퓨터실 한쪽에는 고장난건지 어쩐건지 컴퓨터 모니터와 본체,프린터 일부가바닥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단순히 보면 학교나 학생에게나 별로 매리트가 없어 보이는 컴퓨터실 이었지만, 방과 후 이 곳의이용자는 꽤 많아서 자리 비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는데 알고보니 그 곳은 신교사 컴퓨터실 처럼 이용권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때문에 방과후 학교 학생이면 아무때나 와서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때부터 구교사와 신교사를 왔다리 갔다리 하는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다 잊어먹었지만 구교사 컴퓨터실 컴퓨터를 키면 항상 입력해야 했던 명령어가 있었다. 기억나는것중 하나가 HBIOS.COM인거같았다.(이점에선 분명하지가 않다;_; 컴퓨터를 키면 항상 뭔가 치긴 쳤었는데....)칠판에는 이러한 몇가지 명령어가 크게 적혀있었고 처음다루는 학생들을 위해서 컴퓨터의 전원을 누른 후 해야 할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칠판 빽빽이 적어두었던 상황이 기억난다.
구교사 컴퓨터실은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탓에 자리가 비고 다른 사람이 않는데 돌아가는 시간이 오래 걸렸었는데 심하면 1시간이나 2시간씩이나기 달리거나 그날은 이용을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물론 나는 이러한 상황이 되면 신교사 컴퓨터실에 가서 매킨토시를건드렸다.)자리별로 시간을 지정하지 않으면서 하는탓에 벌어진 상황이었던 것이었는데 이 외에도 이러한 상황을 만든것이 한 도스프로그램에 의한 상황이기도 하였다. DOS가 잘나가던 시절 누구나 한번쯤이면 써봤던 프로그램일텐데 바로 '맥스'였다. 이프로그램의 인기는 학생들 사이에서 식을 줄 몰랐는데 당시 컴퓨터에 깔려 있던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교육용 프로그램이었는데다가 사람이 아닌 컴퓨터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초등학생으로서는 신기하게 비쳐보였는지도 모르겠다.
2학기 중반즈음에다시한번 큰아버지 댁에 가 보게 되었다. 명절 준비로 찾아가게 된 것이었는데 이때 나의 관심은 명절 준비나 음식거리보다 친척형방에 있던 컴퓨터였다. 이 때의 컴퓨터는 수리가 다 되었는지 상판이 제대로 덮힌채 모니터가 얹어져 있었다. 오오 하면서 물끄러미 컴퓨터를 처다본 나를 발견한 친척형이 재미있는걸 보여 준다면서 컴퓨터를 켰었다. 이때 깔린 운영체제가 윈도우즈 95였던 것같았다.(당시라면 윈도우즈98이 나왔을 시절인데 어째서 95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막연히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비용이부담되었나 보다 하고 넘어가고 있다.) 윈도우즈 95가 부팅이 끝난후 친척형은 이것저것 뭔가를 실행하더니만 어느 프로그램을띄우자 나를 자리에 앉혀 놓고 한번 해보라고 나에게 마우스를 넘겼다. 나는 그냥 학교에서 하던 인터넷 비슷한거 보다 싶어서이것저것 아무거나 눌러본후에 감을 익힌후 인터넷이나 친척형이 프로그램 안에 띄어둔 다른 화면을 이용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프로그램이 NETSGO브라우져 였던것 같았다. 결국 난 다른 사람들과 달린 PC통신 이용후 인터넷이라는 과정이 아닌 인터넷사용후 PC통신이라는 희한한 과정을 거쳐보게 되었다.(이부분도 명확하지 않은게 유니텔 일 수도 있다.) 이후 가끔 PC통신을이용해 보게 되었으나 당시 내 근처에는 PC통신을 이용하던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내가 PC통신을 이용하던 경험은 몇시간도 되질않았다.
2학기가 끝나 갈즈음에 구교사,신교사 컴퓨터실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학교측에서 시대상황에 맞추어 학교에 있는 컴퓨터실의 모든 컴퓨터들을당시로선 최신형인 PC로 교체하기 시작 한 것이었다.(기억으로는 삼성 업무용 이었으리..)이때의 나는 마음이 상당히 복잡했었는데정들고 그만한 컴퓨터는 없지 않을까 싶었던 맥킨토시를 학교측에서 처분한다는 착잡함과 PC를 설치하기 위해 한쪽 구석으로 몰려방치된 매킨토시를 보며 '본체 한대 들고가도 모르지 않을까?'싶은 삐뚤어진 소유욕구에 맥킨토시가 치워지고 컴퓨터가 전부 PC로바뀔때까지 휘둘러 다녔었다.(물론 가져가지는 못했다. 나중에 가져간후 부모님한테 들켜서 뒤탈이 생길까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에 들어서고 부터는 제대로된 성능의 PC를 만질 수 있었고 지금까지의 내가 가지고 있는 실력의 40%는 이때 형성 되었던 것 같았다.
4학년으로 진급후 학교측에서는 새로운 계획을 준비하였는데 각 학년과 반에서 특정 학생들을 뽑아 학생들에게 PC교육을 시킨 후에 그아이들중 우수한 학생에게 PC와 인터넷 이용비를 무상 보조해 주기로 한 것이다.(아마 이때 정부에서 실시한 특정계층의 학생들에게PC와 인터넷비의 무상제공을 위하여 학교측에게 전달 사항을 내렸을 테고 학교측에서는 이를 위해 학생들을 모아 PC교육을 시킨후그 중에서 선발을 시킬려고 한 것이었다.) 마침 이때의 담당 선생님이 당시 나의 반 담임이 준비하였었기 때문에 나 또한 쉽게선발 학생뽑혀 가게 되었고 약 1년동안 PC교육을 받게 되었다.(1년이었는지 반년인지 이개 또 기억이 애매하다--;)
이 때의 수업은구교사의 컴퓨터실에서 진행했었고 주 수업내용은 키보드타자 연습과 한글 97의 연속이었는데 한번은 이런 사건이 있었다. 당시 수업시 사용하던 컴퓨터는 고정 자석이었는데 가끔 간간히 내가 쓰던 PC의 바탕화면이나 해상도 아이콘이 변경되어 있었던 것이었다.철이 없었는지 어쨋는지 그러한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던 나는 PC에 비밀번호를 걸어버리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그 PC는 나만이용하는게 아니라 평소 일반 학생의 수업용으로도 쓰였기 때문에 수업시 결국 나의 자리는 아무도 쓰질 못하게 되었었고 이후담임에게 엄청나게 깨졌었던 기억이 있다.
4학년 2학기 학교에서는 원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정보검색대회와 문서작성대회를 열었다. 그때 나의 학교에의 학생들은 나름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던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참여자 수는 꽤 많았고 나 또한 참여하서 두 대회 모두 우수상을 타게되었다. 이 때의 대회중 정보검색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 당시 정보검색대회는 신교사 컴퓨터실에서 하게 되었다. 대회 형식은 과제가 적힌동이를 참가자에게 돌린후 과제에서 요구하는 정보를 검색엔진에서 검색하여 종이에 적어 내는 것이었다. 총 10문제 였던 것으로기억하는데 나는 9문제까지 풀어서 우수상에 그쳤었다. 최우수상을 받은 아이는 내 옆자리에 있던동갑내기로 추정되는데 한번은 실수로답을 적어내기 위해 쓰던 연필을 그 아이 옆에 떨구던 바람에 우연히 대회도중 그 아이의 모니터를 보게 되었다 그 아이가 검색에이용하던 엔진은 엠파스 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의 나는 검색을 전부 야후, 라이코스, 알타비스타 만으로 검색하고 있었다.뒤늦게 알은 사실이지만 당시의 엠파스의 검색엔진은 엠파스 한곳에서 각종 여러곳의 검색엔진사이트를 동시에 검색하고 있었기 때문에여러 사이트를 돌며 검색을 하던 나와 달리 그 아이는 엠파스 한곳에서 대부분의 정보를 검색 할 수 있었고 그덕에 나보다 상당한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은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있지만 당시의 나는 자료 검색에 상당히 자신 있었기 때문에 우수상에그쳤었다는 것에 상당한 실망감을 느꼇었다.
이 시기에는 PC방 이라는 곳을 처음 다녀보기도 하였다. 집에서 좀 떨어진 거리에 있었던 PC방 이었는데 희한하게 그 PC방컴퓨터의 일부는 모니터가 일반 브라운관모니터가 아닌 텔레비전으로 구성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채팅이 유행하고 있었는지 하두리나 버디버디(세이클럽도 유명했던걸로 기억하나 이 때의 시기였는지 아니면 이 이후였는지 기억나질 않았다.)를 하는 사람이많았었다. 특히 하두리 화상채팅이 잘 나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PC방에서 웹캠이 있었던 자리는 항상 만석이었다. 이때 반호기심으로 하두리와 버디버디의 아이디를 만들게 되었었다. 이 시절의 PC방 하면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구설수가 있었는데 바로스타크래프트와 포트리스였다. PC방에서 웹캠 좌석이 하두리 이용자로 만석이었다면 일반석에는 담배연기와 함께 스타크래프트와포트리스를 플레이 하는 유저로 꽉 차 있었다. 스타크래프트는 너나 나나 하기에 당시의 나도 꽤나 관심이 있었는데 정작 해보지는못했었고 치트키 몇개정도 외워 보았을뿐이다.(그래서 show me the money 치트키 하나는 기억하고 있다.)스타크래프트는 현재 지금도 해본적이 없는데 아마 대한민국 90년 생 중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내가 유일 하리라장담한다. 포트리스는 내 또래 사이에서 상당히 유행 했었는데 집에서 굴다리 건너 꿈돌이방인가 하는 곳이 있었다. 경찰서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기억하는데 할일 없는 청소년들이 심심하면 놀라고 운영하는 곳이었다. 1층에는 펌프와 만화방이 있었고(펌프도 상당한인기였던지라 펌프를 하기 위해서 중학생 이상의 형들로 항상 만석이었다. 지나갈때마다 베토벤 바이러스나 터키행진곡등이 항상울러퍼지고 있었다. 만화방에는 자판기가 하나 있었는데 희한하게 라면을 팔던 자판기였다. 메뉴는 전부 왕뚜껑 하나로 통일 되어있었던 것 같았는데 돈을 넣고 라면을 뽑으면 껍데기를 벗기고 자판기 안에 집어넣어서 물을 받는 형식이었다.)2층에는PC실이었다. 2층 PC실은 웹캠이 없었기 때문에 스타크래프트 아니면 포트리스 였었으나 주 이용층이 초등학생 이었기 때문에대부분 포트리스를 줄기차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포트리스보단 피카츄 배구나 포켓몬스터만 줄기차게 해대었을뿐이었다.(사실 나는 꿈돌이방의 주 이용 목적이 PC보단 만화책이었다. 일찍가서 꿈돌이방이 닫는 시간까지 않아서 명탐정 코난을완독을 하고 있었다..;) 이 때 포켓몬스터를 디스켓에 담아가지고 다니기 위해 처음으로 윈도우즈용 압축프로그램을 이용해 보게되었는데(맥에서는 스터핏 익스펜더라는 어플리케이션이 있었지만 맥을 쓸때는 자료를 가지고 있거나 큰 파일을 이용할 이유가 없었기때문에 쓸 일이 없었다.) 알집을 이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나는 포켓몬스터를 받은 후에알집을 통해 분할 압축하여 디스켓에 담아서 인터넷이 돼지 않는 다른 친구네집에 설치를 해 주었다.
5학년이 되었던 때에는 지금의 집이 있는 동네로 이사를 가게되어 학교를 전학하게 되었다. 이사라곤 해도 구와 학교만 바뀌게 돼었을뿐이다. (당시 내가 이사간 동네는 나름 잘살던 동네였다. 그렇다곤 해도 우리집이 잘 살게 된건 아니었다. 단지 그 동네의집값이 엄청나게 펄쩍 뛰기 이전에 한푼 두푼 모아 작은 평수의 아파트를 구해 놓으셧던 것 이었다. 실제로는 잘 산다곤 해도평균치일 뿐이지 빈부격차 또한 엄청나게 큰 동네였다.)4학년 겨울 방학식을 하기 몇 주 전에 이사를 간 것이기 때문에 방학식이전까지는 버스로 학교를 통학하게 되었고 이후 5학년으로 진급하자 마자 바로 학교를 집앞 근처의 초등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전학한 학교에서도 컴퓨터실이 2곳이었다 한 곳은 4층에 있었으며 나머지 한 곳은 2층에 있었다. 이때의 컴퓨터는 다른학교들과마찮가지로 무난하게 IBM PC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전 학교처럼 방과 후에는 학생들에게 컴퓨터실을 개방하지는 않았다.때문에 전학 이후 컴퓨터는 건드려보기 힘들겠구나 하고 포기하고 PC방을 다녀야 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에 집으로 대형 소포물이날라왔다. 알고보니 4학년때 했었던 PC수업에서 마지막에 컴퓨터를 지급 할 학생을 선발하는데 내가 등록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이때의 컴퓨터 스팩을 기억하고 있는데 삼보 드림시스 오피스 시리즈중 하나로 인텔 팬티엄 셀러론 600MHz 프로세서(이건명확하지 않은것 같다)에 128MB의 삼성SD메모리와 시게이트 20GB 하드디스크(이 하드디스크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i810내장 그래픽 보드였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처 코웃음 칠 스팩이었으나 당시의 나로서는 펄쩍 좋았었다. 나만의 컴퓨터가 생긴것이기에 더 이상 힘들게 컴퓨터를 하기 위해서 PC방을 전전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컴퓨터와 더불어 인터넷도 정부지원이었기 때문에 당시 한국통신(KT로 언제 변경되었는지 기억이 잘 안난다..;)의 매가패스 B&A를 신청하게 되었고이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이 녀석을 쓰게 되었다.
인터넷을 집에서 할 수있게 되면서부터 각종 사이트를 돌아다니게 돼었고 여러 가지에 흠취에 가기 시작하였다. 특히 애니메이션과 미연시(...)를 알게 된 이후로부터는 애니메이션을 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 하기도 하였으며 친구들에게미연시라는 장르의 게임을 하고 있다 함으로서 '나는 너희들과 노는 물이 달라(...)'를 주장 하면서 다니게 되었다. 지금그때는 얼마나 얼마나 당당하게 말하고 다녔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기기도 하고 머리를 붙잡고 심각하게 고뇌를 하게 되었다.
6학년에 넘어와서는특별한 사건이 없었다. 이 시절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라면 당시 학교의 방과 후 수업의 일환으로 정보처리 기능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모집하였었는데. 이 때에 나도 수업을 듣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 결과는 꽤 참담하였는데 첫번째에 본 필기에서 아슬아슬한 점수로 떨어졌었다. 이때에 나름컴퓨터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기초 이론에 상당히 부실하게 준비 하였었기 때문이었는데 행동에 대한 결과가 그대로 돌아온꼴이 되었던 것이었다. 이후 두번째로 보게된 정보처리 기능사 필기 시험은 나름 높은 점수로 통과 하였었으나(정확한 점수는 기억은 나지 않았으나 당시 정보처리 기능사에서 요구하는 커트라인보다 훨씬 높은 점수 였던걸로 기억난다.) 처음 보았던 시험에 대한 충격이 내 자신으로서는 심하게 작용하여서 였는지 이때부터 최근까지 자격증은 따려고 하질 않게 되어버렸었다.
중학교에 들어와서 부터는 본격적인 야메AS기사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뭐라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내 자신으로서는 그런 여러가지 경험이 나에 컴퓨터에 대한 지식을 넓혀 줄것이라 믿었었고 마음 한편으로서는 6학년때 겪었던 정체되어 버린 내 자신을 극복해 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었다. 이러한 활동은 얼마 안가서 정말로 실력향상에 큰 도움이 되긴 돼었었고 경험이 쌓여감에 따라 나름의 노하우와 식견이생겨나게되었다.(왠만한 트러블이면 포맷이나 재설치가 정말 쉬운 답이긴 하지만 돈과 시간이 들긴 하여도 포맷없이 문제의 기저원인을해결해 나가는것도 재주임을 느끼게 되었었다.)그러나 자격증 이후로 겪게되버린 나 자신에 대한 정체는극복해 나가질못하였다.
이 시기에는 처음으로 동아리 활동이란걸 시작하게 되었었다. 컴퓨터 부란 곳에 들게 되었었고 그곳에서는 학교의 홈페이지 서버를 관리하거나 선생님을 도와 학교 기자제의 유지보수를 돕는 작업을하고있었던 동아리 였었다. 초반에는 telnet를 이용해서 리눅스 서버에 접속해서 간단한 기초 명령어를 배워가기 시작했었으나 동아리가 학교 특색 사업과 병행되어 가기 시작하면서 동아리는 다른 동아리로 변하게 되어 인터넷 방송부 라는 동아리가 되어버리게되었었다. 이 때에는 컴퓨터가 아닌 다른 방향에서 나름의 성장을 얻게 되었었다. 1학년 시기에는 실제 방송 촬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2학년에서 부터나 가르쳐 주는 각종 방송장비 조작법과 프리미어 조작법을 어깨넘어 굽실굽실 거리면서 배워가기 시작하였었다.

RT-X 100 -출처:ibelkin.com-
동아리에 들어가면서 가장 큰 좋은 점은 당시로서는 1000만원이 넘어가는 초고가의 논리니어 편집 장비를 다룰수 있었다는 점이었는데 당시의 스팩은 인텔 xeon프로세서를 멀티 cpu로 구성한 시스템에 하드디스크는 용량이 얼마인지는 기억이 안나나 RAID-0로 구성되어 있었고 램은 1GB에 당시로서는 최강의 편집보드라 생각하고 있는 MatroxRT-X100(이 부분은 솔직히 명확하게 자신이 없다 matrox임은 확실하나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 나중에 메트록스의라인업을 뒤져 가 보면서 당시 편집 시스템에 달려있던 보드와 구성물이 유사한 것을 집어다 내린 결론이었다.)을 달고 있었다. 단지 그래픽 카드가 빈약했던 편이었는데 Geforce 4 MX 440을 장착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이전에 학교에서 받은 시스템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껴가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램과 하드디스크 용량 부족은 나를 시도 때도 없이 괴롭혀 왔고 특히 내장형 그래픽 카드라는 점은 인터넷은 자유로울지 몰라도 그래픽 적으로나 요구사양적으로나 나날이 발전에 가는 온라인 게임에 대한 장벽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좀더 고사양 시스템을 건드리고 싶었던 충동에 휩싸여 가고 있었던 중이었다.

핸드스프링사의 Visor Prism -출처:nbinside.com-
PDA 도 구입하게 되었었다. visor prism이라는 palm계열의 PDA였는데 옥션에서 중고가로 5만원인가 6만원에 구입하게 되었다. 160x160의 해상도와 8mb의 메모리를 가지고 있던 놈으로 사양 자체는 다른 pda와 비교해 보면 빈약한 편이긴 하였다. 포켓PC나 자우루스 같은 강력한 성능을 가진 PDA도 많았으나 당시에 palm계열의 pda를 선택한것은 나름 제대로 된 일정관리를 해보자는 개념을 하고 싶었고 어디선가 일정관리는 palm계열의 pda가 가장 좋다는 말을 들은것이 시초였다. 멀티미디어 기능 자체로서는 상당히 빈약한 편에 속해있지만 이 점을 빼고 본다면 내 활용목적에 최적인PDA였고 지금도 이 선택을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2학년으로 올라가고서 부터는 온라인 게임에 미쳐가기 시작했었는데 당시 오픈베타로 운영되었던 '마비노기'였었다. 이 때에는 너무 마비노기에 빠져 있었던 나머지 중간고사 시험날 전까지 PC방에서 마비노기의 광랩에 미쳐가고 있었다. 이러한 뻘짓이 얼마나 심해져 갔는지 나중에는 그 값비싼 고급 영상편집 장비에 마비노기를 깔아서 게임머신으로 전략하게 만들고 동아리 방의 불을끈후 친구와 작당하고 학교 수위 몰래 밤 8시 이후에서 까지 마비노기에 미쳐가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었다.(얼마나 맛이 갔나면 최대한 수위의 눈과 센서를 피하기 위해서 스피커의 소리는 끄고 CRT모니터의 불빛은 최소한으로 하였으며 손을 제외한 나머지 몸동작이 생기지 않도록 의자를 바꾸고 팔을 제외한 상하반신을 고정 하려는 시도도 했었다. 심지어는 아예 천정 위에 있는 센서를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지금 생각하면 내가 뭔 뻘짓을 했는가 싶을 지경이다.
인터넷 방송부에서는 좀 더 심층적인 과정을 배워가게 돼었다. 카메라 영상과 영상간의 전환시 효과를 넣는법이나 상황에 따른 영상전환, 포토샵 입문의 시작과 프리미어 이용시의 심층적인 조작기법들을 숙련해 갔다.
그리고 조금씩 푼돈을 모아 중고로 ibook G3를 구입하게 되었다. 내 첫 노트북 이기도 하였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적 처음 써본 매킨토시에 대한 환상이 계속 머리에 내다 꽃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매킨토시를 구입해 쓰리라 다짐하였고 그것이 ibook이라는 형태로 되돌아 왔었다. ibook은 그러한 나의 맘을 잘 알았는지 어렸을적에 대한 향수를 '잠깐'느끼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운영체제 자체는 OS X였기때문에 뒤로 가서는 OS9과는 다른 느낌에 이질감을 느끼기도 하였었다. 하지만 OS X의 익스포제 기능이나 화려한 디자인 자체는 windows와는 다른 느낌을 가져다 주었고 OS X에 금방 익숙해져 가게 되었다. 이렇고 저런 고생을 해 가면서 ibook에 익숙해져 갔고 왠만한 작업을 ibook에서 처리 할 수 있게 되었으나 당시 제대로 처리하기 힘든 작업이 있었는데 동영상 재생이었다. 저해상도의 low프레임의 애니메이션이라면 그런대로 돌려주었으나 중급 해상도의 영상을 돌리기에는 힘든 편이었다.
3학년에 올라가서 부터는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상당히 무력했던 시간이기도 하였는데 여전히 마비노기에는 빠져 있었지만 예전 만큼은 아니었는데다가 마비노기 접속 횟수도 줄어가는 상황이었다.
동아리에서는 부장을 맡게 되었었는데 이때 내가 사람을 통솔하는 능력이 얼마나 없는 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부원 관리가 제대로 돼지 않아 조직체계가 무너져 갈 판이었고 부원들은 내 말을 듣지 않으니 이 만큼 답답했던 시절도 또 없었을 것이다.
부장이 되자 마자 개학식날 사건이 하나 터졌었는데, 방송 장비중에 스위쳐라는 장비가 있다. 이 장비는 카메라와 카메라를 연결하여 화면전환을 하는데에 쓰이는 장비이다. 당시 동아리 에서는 2대의 스위쳐를 보유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 장 비싼 기종이 개학식 촬영 30분 전에에 고장이 나 버렸었다. 리허설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돌아가던 놈이 촬영에 들어가려고 하자 마자 사망(..)길에 오른터라 진행을 준비하던 나로서는 상당히 난감 할 수 밖에 없었고 나머지 다른 예비 스위쳐를 도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놈이 220V가 아닌 110V였었기 때문에 변압기를 별도로 준비 하였어야 하는데 당시 패닉에 빠져 있던 나는 변압기를 미쳐 준비하질 못하고 바로 220V에다 스위쳐를 물리게 되었다. 220V라고 해도 처음에는 잘 작동하였기 때문에 촬영은 그대로 속행 준비로 들어가게 되었고 본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본방 10분 후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하더니 스위쳐에서 퍽 소리가 나면서 화면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스위쳐에서는 연기가 나기 시작하였다. 결국 전교생이 보는 생방송에서 대형사고가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부랴부랴 스위치를 제거 하고 카메라 한대로 방송을 진행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PDA 가 박살이 나기도 하였었다. 당시 잠시 다른 동으로 이사간 친구네집에 놀러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던중 내려할 때에 평범하게 내리면 될 것을 버스 계단을 밟지 않고 뛰어서 착지(...)를 하는 바람에 좀 헐렁한 옷 윗주머니에 있던 PDA가 바닥에 떨어지게 되었고 결국 PDA는 두 조각이 나 버렸다. 안의 기판 자체는 멀쩡하였으나 케이스는 거지조각이 되어 버렸고 터치패드는 돌부리에 찍힌 나머지 인식은 되나 도저히 제거 할 수 없는 흉한 기스가 나 버리게 되었다. 이 후로 PDA를 교체하게 돼었는데 최근까지 쓰게 되었던 palm zire71로 갈아타는 계기가 되었다.
고1에 올라가서 부터는 컴퓨터를 할 시간이 극단적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대한민국 인문계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야간 자율 학습이란것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 할애해야 하여야 했기 때문에 컴퓨터를 할 시간은 정말 적어 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당시 나는 이런 빡빡한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초반에 ibook을 들고 다녔었으나 반 친구들의 눈치와 교과서를 포함해서 들고 다니다 보면 극악의 무게 때문에 결국 얼마 가질 못하여서 들고 다니는걸 포기하고 대신 pda에 동영상을 넣고 다니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하였다. zire71은 나름의 성능을 내 주던 PDA였기 때문에 별도로 인코딩을 하여 SD메모리에 애니메이션과 일드를 넣고 다니면서 쉬는 시간과 야자시간 짬짬이(...) 동영상을 감상하게 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끔 발악으로 미연시(...)를 컨버팅 해서 pda에 넣고 돌려보는 괴랄한 짓을 해 보기도 하였으나 일본어간의 지원문제나 용량부족, 결정적으로 언어의 장벽(...)에 막혀서 얼마 가지 않아서 삭제를 하게 되었다.

Fire!!!
컴퓨터도 교체하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 나의 담임 선생님이 정부 지원으로 학생에게 컴퓨터와 인터넷을 제공하는 사업의 학교 담당자 였기 때문에 그 덕으로 컴퓨터 인터넷을 한번 더 무상으로 제공 받게 되었었다. 당시 스팩은 팬티엄4 630에 512MB 인피니언 메모리, 130GB하드 디스크와 내장형(...)그래픽 사양이었다. 이놈은 스팩 자체를 떠나서 무지하게 뜨거웠는데.....팬티엄4 630은 당시 프레스캇 계열의 cpu로서 엄청난 발열을 자랑하던 놈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유행했던 말이 "요즘 날씨도 쌀쌀한데 장모님 댁에 팬티엄4 하나 놓아 드려야 겠어" 였는가(...) 이 시절 나는 컴퓨터 끄기 귀찮아서 밤새 항상 켜놓았는데 마침 컴퓨터가 부모님 방에 있었고 한 여름에 까지 계속 돌렸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밤마다 매일 같이 열대야를 느끼셧다고 한다.(죄송합니다 어머님...)
고2로 올라가고 나서는 pda에도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본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인터넷을 즐기는 일이었고 나의 pda에는 무선랜을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기존에 있던 ibook G3는 아는 형에게 한국판 뉴타입 초판부터 2003년인가 2004년판 분량을 교환 조건으로 건내 줘 버렸기 때문에 새로운 노트북을 준비 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부모님 몰래(...) 모은 비자금으로 약 60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Sony-U70을 구입하게 되었고 학교 컴퓨터에 엑세스 포인트를 설치하여서 결국은 기여코 쾌적한 인터넷 life를 구축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이와 비례하여 성적이 떨어졌음을 말로 할 것도 없다.) 이때에 같이 블루투스 헤드셋으로 플랜트로닉스의 헤드셋을 구입하게 되었으나 고질적인 파손 불량에 의해서 얼마 못가서 쓰지 않게 되었다.(당시 중고로 13만원에 구입하였는데 판매자가 보증서를 분실하고 사본만 가지고 있던 탓에 AS를 받기 위해 무려 AS센터까지 기차와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삼고초려(...)를 하였으나 결국은 불량 교체를 받지 못하였다.)
컴퓨터도 갖가지 고생을 하게 되었는데 동생이 컴퓨터를 발로 차대끼는 바람에 cpu쿨러의 팬이 3~4개 남기고 전부 나가 버린 사고가 나버렸던 것이었다. 당시 당장의 돈이 없던 나는 환풍을 위해 달려있던 작은 쿨러를 일단을 돌고 있던 cpu쿨러 위에 얹은 후 바인드로 두개를 묶어 버리는(...)괴랄한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생의 시도때도 없는 발차기는 결국 컴퓨터가 가다 못해 메인보드 까지 사망에 이르는 결과를 불러오게 되었다. 결국 난 부모님의 설득으로 메인보드와 cpu쿨러를 교체하게 되었는데 극 최근까지 쓰고 있던 ASROCK메인보드와 프리저7이라는 히트파이프 내장의 쿨러였다. 메인보드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 새로 산 cpu쿨러는 부피가 상당히 큰 탓에 슬림형 케이스인 내 컴퓨터에는 그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케이스 옆 상판을 열어둔채 써야 하는 판이 되었고 이후로 내 컴퓨터는 계속되는 부품 교체로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파워 불량으로 에너맥스 파워로 교체하게 되고 램은 용량 증설을 위해 1GB 삼성램을 얻어다 달게 되었고 cpu는 3학년 즈음에 지금 쓰고 있는 E2140으로 교체하게 되고 메인보드도 한번더 교체하고 케이스로 한번 더 갈아버리게 되어 기존에 남아 있던 부품이라곤 하드디스크 라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한 번은 컴퓨터 수업 실습 시간에 실습을 하던 도중 학생들이 너무 떠들어 대자 여기에 열 받은 선생님께서 컴퓨터의 시스템 종료 명령을 관리 컴퓨터에서 내린 적이 있었다. 이 때의 컴퓨터실의 컴퓨터는 전부 꺼지게 되었었는데 내가 잡던 컴퓨터는 꺼지질 않았었다. 별도로 사전에 관리 프로그램의 클라이언트 어플리케이션과 서비스를 강제 종료 시켰기 때문이었는데(보통은 종료도 되지 않게 하는게 기본이다.) 이 일로 인해 컴퓨터 선생님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이메진 컵 국내 대표 선발전에도 참가 하기도 하였는데 경위는 당시 소프트웨어 쪽으로 이메진컵에서 국내 진출팀이 2위를 했다는 기사를 보게된 것이다. 이때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는데 나도 뭔가 남기고 싶다는 맘에 아는 친구과 형과 함께 대회 진출 준비를 하게 되었다. 주제는 IT기술로 환경보전을 이루는 방법을 구상 하라는 것이었고 우리팀은 각종 재해 상황 발생시 각종 매체를 통해 재해상황에 대한 실시간 정보 수집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구상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때의 우리는 우리의 아이디어를 구상 할 충분 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한마디로 제대로 된 프로그래밍 능력을 가지지 못했는데 당시 우리의 생각은 통과만 하면 일단 밤새서 밀어 붙여보자 였던 것이었고 1차 과제로 프리젠테이션과 개요를 작성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이때 실제로 1차 과제를 통과 하게 되었고 아마 이메진컵에서 고등학생부 폐지 이후 일반계고등학교에서 처음 통과 한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2차 과제는 직접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사에 가서 실제 마이크로소프트웨어사의 직원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시연하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팀 누구 하나도 공개적으로 프리젠테이션을 시연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프리젠테이션은 최악이라 할 정도였고 2차는 떨어 지게 되었다.
고3때에는 고2때 벌였던 행각이 극에 달하였다. 잘 들고 다니던 U70이 액정의 사망하여서 수리를 하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동안 쓰질 못하게 되었다.(Sony AS센터에 맞기니 액정을 일본에서 구해서 수리하여야 하기 때문에 수리비용 50만원을 불러서 게엑 하고 놀라버렸다. 역시 Sony Style 어디 가지 않는다. 결국 난 중고장터를 몇달동안 매복하면서 U70의 액정을 구하다 자가수리를 하게 되었다. 그덕에 이제는 U70의 분해와 재조립에는 도가 트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맞물려서 새로 구입한 기기가 있었는데 ipod touch 였다. 잘 써 오던 zire71도 액정 불량으로 인해서 새로 사는 편이 나아질 정도로 거지 꼴이 되어버렸기에 대체품을 찾던중 ipod touch가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의 아이팟 터치는 터치 그 자체만 두고 본다면 활용성이 적었다. 인터페이스나 조작방식 자체는 나름 새로웠고 재미있다고 볼 수 있었지만 그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mp3이면서 wi-fi를 내장 하였다는 점과 여기에 엔드유저들이 해킹이라는 작업을 성공 함으로서 활용성을 극대화 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PDA의 대용품으로서의 가치가 있었다.(가끔 해킹에 대한 정당성을 논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별도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다.)

ipdtouch:이미지는 2세대의 것이다. 처음 구입한 ipodtouch는 1세대였으나 2009년 7월 부산에서 잃어 버린후 2세대를 새로 구입하였다. -출처:apple.co.kr-
iPodTouch 로 많은 장난을 친 적이 있었는데 야자시간에 실시간으로 TV를 감상하거나 수업시간에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수업시간에 컴퓨터의 프리젠테이션을 활용하시던 선생님을 놀려먹기 위해서 사전에 컴퓨터에 VNC를 설치 한 후에 아이팟 터치로 컴퓨터의 마우스를 원격 조작하여 빨간색으로 '우우'를 써대가면서 선생님을 놀라게 만든 적이 있다. 이 때의 선생님들의 반응이 가지 각색이었는데 어느분은 아하하 웃으시면서 이거 해먹은 놈 나와 하면서 몽둥이(...)를 후려 치셧던 분도 게시고 이게 뭐냐 하며 무덤덤 하게 넘어 가신 분들도 있었다.
C# 으로 간단한 번호뽑기 프로그램을 만들어 선생님께 제공해 보기도 하였다. 당시 국어 선생님이 발표시킬 학생을 뽑는데 로또 번호를 무작위로 뽑는 프로그램을 썻었는데 이 프로그램이 이상한 놈인것이 실행시 항상 어느 인터넷 서버에 접속을 한다는 것이었다..데이타 마이닝을 위한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실행시 네트워크 접속이 필요했었고 네트워크에 접속돼지 않거나 서버가 불통이 되면 프로그램이 실행되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이 로또 프로그램이 서버 폐쇄로 인해 작동하질 않았고 결국 나에게 프로그램 제작을 의뢰하게 되었다. 제작한 프로그램은 반 학생수 만큼 번호를 입력 한 후에 시작 버튼을 누르면 그 숫자 내에서 랜덤적으로 번호를 무작위로 추출해 내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약간의 꼼수가 있었는데 그건 내 번호는 죽어도 절대 나오지 않는 다는것이다. 우리 반의 컴퓨터에는 미리 내 번호가 나오지 않는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선생님께 직접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이러한 꼼수는 제거된 프로그램을 드림으로서 고등학교 3학년 국어시간 내내 편한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대학생으로 올라오면서 부터 본체의 대대적인 업그레이드를 마음 먹게 되었다. 하드디스크와 파워 CPU, 주변기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을 갈아 치우기 시작하였는데 모니터는 19인치 LCD wide모니터를 구입하고 메인보드는 ASRock P45XE, 메모리는 하이닉스 2GB 메모리 2EA로 갈아 치웠으며 케이스도 슬림한게 아닌 약간 큼지막한 것으로 바꾸게 되었고 이제 와서야 내장형 그래픽 카드가 아닌 제대로 된 ATI의 HD3870그래픽 카드를 달게 되었다.(이전에도 간간히 ATI Radeon 9200이나 Geforce FX 5200을 써왔으나 어디서 중고로 잠깐 얻어오거나 문제가 하나 씩 있던 놈들이었기에 예외로 치고 싶다..) 현재는 2학기에 올라와서는 웨스턴 디지털의 1TB하드디스크를 달으니 예전과 같은 용량 걱정이 없어져서 한결 편하게 되었다. 처음 컴퓨터 쓸때 하고 비교하면 배부른 사치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이전 시절의 용량을 그대로 쓰라고 하면 쓰기 힘들 것 같다. 현재 운영체제는 우분투 9.04를 이용 중이다.(최대한 정품이나 비 상업 소프트 웨어를 쓰려고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쉬운게 아닌일인 것 같다. 정품과 비정품에 대한 개인의 양심의 문제도 있으며 여전히 소프트웨어의 가격은 일반인이 쉽게 다가가기 어렵다. 특히 윈도우즈 운영체제의 가격은 여전히 접근하기가 어렵기에 비정품을 쓰는 것이 일상하 되어 버린 편이다. 이런 와중에 한글과 컴퓨터의 최근 소식이나 마이크로 소프트사에서 주최하는 이벤트나 대학생들을 위한 프로모션 기획을 볼때 마다 이런 기획들이 쭉쭉 확장해 가야 할텐데 싶은 생각이 든다.)
이 놈의 우분투가 여간 잔망스러운 것이 ATI의 그래픽카드와는 상성이 정말 좋지 못하다. 설치 이후 이것저것 셋팅을 맘새가며 대부분 잡아냈는데 아직도 유일하게 제대로 문제를 잡아내지 못한것이 그래픽카드 문제이다. wine이나 특정 어플리 케이션을 실행하면 모니터를 재 인식 시키기 위해 미친듯이 깜박거리다 실행 되기 때문에 윈도우즈용 어플리케이션을 쓰려고 하거나 일부 동영상 재생 프로그램을 이용하려 할 때에는 짜증이 솟구쳐 올 때도 많다.
하드웨어도 요즘 불만이 많은 편이다. 학기 초 컴퓨터 부품을 선정 했을때 i7과 같은 시스템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은 채 부품을 선정 했다 보니 지금 와서 컴퓨터 부품을 교체하기가 참으로 애매해 졌다. cpu를 바꿀려면 메인보드와 램까지 통짜로 갈아야 할 판이니 할말 다 한 기분이다. 현재의 시스템도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E2140을 국민 오버해서 쓰는 중인데 현재의 온도가 기본 아이들시 55도근처에 육박하고 cpu쿨러 소음도 큰 탓에 다른 기숙사 룸메이트에게 미안할 지경이다.(나는 컴퓨터를 잘 끄지 않는다 밤새 컴퓨터를 켜놓고 돌려대는 편이다.)일단 시기가 되면 쿨러부터 갈아 치워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언제가 될런지 까마득할 지경이다.
글을 쓰다 보니 다른 시절보다 초등학교 시절의 이야기가 길은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다른 시기보다 이때의 시기를 가장 좋아 하였기 때문 인 것 같다. 처음으로 컴퓨터와 인터넷과 PC통신을 접해본 시기였기에 어렸을 적의 나로서는 컬쳐 쇼크 였을지 모르겠다.
나는 PC통신 세대 들에 대해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커뮤니티나 다니다 보면 간혹 고참 회원분들이 계서서 PC통신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 풀으시는 경우가 있는데 그 분들의 글을 읽을때마다 그때는 좋았어 하는 감정이 느껴 지는 것 같았다. 나의 PC통신 경험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는데 그들은 오랜 시간동안 PC통신을 경험해 가며 많은것을 얻어 와서 지금의 그들을 형성해 갔다는 것이 부러운 것일 것이다.
기억이라는 놈은 언제나 애매하며 오래 되어 가는 기억일수록 미화시키거나 왜곡 되어 간다. 내가 이 글을 최대한 왜곡 없이 쓰려고 노력 했어도 기억이란 것은 애매하기에 어딘가 시기가 틀리거나 내용이 다르게 적힌게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몇 년후 이 글을 다시 보게 될때 어 '그때는 이랬던가? 아닌 것 같았는데...' 하고 의심을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기억의 애매함도 내게는 그리움을 남겨주기에 싫지는 않을 지 모르겠다. 단히 잊혀져 가는게 무서울 뿐이다.



















